조명숙

북한이탈주민들은 더 나은 삶을 찾아 대한민국에 이주했지만, 정글 같은 낯선 삶의 현장을 안내자도 없이 마주해야 했습니다. 국경을 넘고 대륙을 횡단하는 탈북 여정은 수개월에서 수년에 걸쳐 지속되며, 이 과정에서 많은 이들에게 쉽사리 치유되기 어려운 정신적 트라우마가 남게 됩니다. 이 트라우마를 치유할 시간도 없이 경쟁이 치열한 한국 사회에 내던져진 북한이탈주민들은 생활고를 비롯한 갖은 어려움에 시달리며, 때문에 북한이탈주민의 자살률과 자퇴율은 기형적으로 높은 실정입니다. 조명숙 펠로우는 북한이탈청소년을 대한민국 사회의 건강한 시민으로 길러낼 수 있는 새로운 교육 모델을 제시합니다.

This profile below was prepared when 조명숙 was elected to the Ashoka Fellowship in 2015.

INTRODUCTION

북한이탈주민들은 더 나은 삶을 찾아 대한민국에 이주했지만, 정글 같은 낯선 삶의 현장을 안내자도 없이 마주해야 했습니다. 국경을 넘고 대륙을 횡단하는 탈북 여정은 수개월에서 수년에 걸쳐 지속되며, 이 과정에서 많은 이들에게 쉽사리 치유되기 어려운 정신적 트라우마가 남게 됩니다. 이 트라우마를 치유할 시간도 없이 경쟁이 치열한 한국 사회에 내던져진 북한이탈주민들은 생활고를 비롯한 갖은 어려움에 시달리며, 때문에 북한이탈주민의 자살률과 자퇴율은 기형적으로 높은 실정입니다. 조명숙 펠로우는 북한이탈청소년을 대한민국 사회의 건강한 시민으로 길러낼 수 있는 새로운 교육 모델을 제시합니다.




THE NEW IDEA

북한에서 그리고 탈북 과정에서의 트라우마와 남한 사회 적응의 스트레스가 극심한 북한이탈청소년에게 정착 지원과 교육은 필수적입니다. 그런데 북한이탈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기존의 교육적 접근 방법은 주로 이들을 일반 학교에 편입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이들이 일반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면 검정고시를 치르게 해 가능한 한 빨리 사회에 편입하도록 하는 것을 최선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학업에 치우친 이러한 접근법은 오히려 북한이탈청소년이 남한 사회에 제대로 적응할 수 없게 했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명숙 펠로우의 제1 교육 철학은 모든 학생에겐 그들에게 맞는 교육 방식과 기준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특히 북한이탈학생들에게는 그들의 가족까지 고려한, 심리적인 회복과 전인적인 성장을 돕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조명숙 펠로우는 이를 위해 정신 건강, 사회 적응, 학업 성취라는 세 목표를 모두 균형 있게 충족시킬 수 있는 교육 환경과 커리큘럼을 고안했습니다. 이를 통해 이들은 북한 체제 하에서, 또 가혹한 탈북 여정 동안 유린당했던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꿈을 발견하며, 내적으로 충만한 개인, 더 나아가 사회에 기여하는 시민으로 발돋움하게 됩니다.

조명숙 펠로우는 이처럼 북한이탈청소년의 여건과 필요를 충분히 고려한 새로운 학교 시스템을 설계했습니다. 바로 여명학교입니다. 조명숙 펠로우는 학교의 정규 커리큘럼을 학과 교육, 심리 치료, 사회 적응을 돕는 체험 활동 세 갈래로 묶었습니다. 그리고 북한이탈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대안학교 중 최초로 학력 인가를 받아, 학생들이 검정고시에 대한 부담을 떨쳐 내고 정신 건강과 사회 적응을 위한 여명학교의 프로그램에 안심하고 참여할 수 있게 했습니다. 또한, 학교에 심리 치료 전문가를 상주시켜 학생들이 시간적·금전적 여유가 없어도 자연스럽게 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여명학교를 도심 중앙에 자리잡게 해, 학생들이 등•하교할 때마다 사람들의 생활을 관찰하며 낯선 환경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또한 선생님과 자원봉사자로 구성된 인적 안전망을 구축, 학생들이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줄 아는 체인지메이커로 성장할 수 있는 이상적인 환경을 조성했습니다. 

조명숙 펠로우의 목표는, 대한민국 공교육이 기존의 천편일률적 교육방식에서 탈피해, 새로운 소수자 집단의 다양한 요구를 수용할 힘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조명숙 펠로우는 제도를 개혁, 다문화 인구 증가라는 현실의 변화에 교육 시스템이 더욱 유연하고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통일부의 관계자들을 설득하여, 인가 받은 북한이탈청소년 대안학교에 정부가 운영비를 지원하는 새로운 제도를 이끌어 낸 것입니다. 또한 사회적 소수자 집단에 특화된 학교를 만드는 시도가 학교 시설의 규모 등으로 인해 좌절되지 않도록, 비합리적이고 비효율적인 행정 절차를 개선했습니다. 노하우와 전문성을 갖춘 대안학교들이 정부로부터 학력을 인가 받을 수 있는 길을 개척한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조명숙 펠로우는 대한민국 사회 전반이 더욱 유연하고 개방적인 태도를 갖추고, 소수자와 이민자를 마찰 없이 수용할 수 있는 문화적,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고자 합니다.




THE PROBLEM

해마다 1,500명가량의 북한 주민이 자유와 더 나은 삶을 찾아 목숨을 걸고 탈북해 남한 땅을 밟습니다. 90년대 중반 북한을 덮친 기근으로 97년경부터 급작스레 북한이탈주민이 증가한 이래, 남한은 매년 최대 3,000명에 달하는 북한이탈주민을 받아들여 왔으며, 현재 남한에 거주하는 북한 출신 주민은 총 28,000명(2015년 6월 기준)에 달합니다. 비무장지대라는 이름과는 달리 세계에서 가장 삼엄한 무장경비를 자랑하는 남북한 간 국경을 넘는 일이 사실상 불가능하기에, 모든 북한 주민은 중국을 가로지르고 태국이나 라오스 등 제3국을 거치는 기나긴 여정 끝에 대한민국 영토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 북한 주민 중 70%는 여성으로, 이들 중 다수는 탈북 과정에서 인신매매, 매매혼, 강제송환의 위험과 이에 대한 만성적인 두려움 등 극심한 신체적·정신적 어려움에 심각한 트라우마를 갖게 됩니다.

남한에 입국한 북한이탈주민 중 상당수가 정신건강 차원에서 도움을 받아야 함은 자명하나, 기존의 정착 지원 시스템은 이를 우선순위로 삼기보다는, 북한이탈주민으로 하여금 가능한 한 빨리 사회에 편입하도록 하는 것을 주요 목표로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심리적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일차적으로 가족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으나, 북한이탈청소년의 가족은 이산과 생활고로 인해 이러한 안전망 역할을 수행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설상가상으로 많은 북한이탈주민은 일상의 간단한 업무를 처리하는 것에도 어려움을 느낍니다. 카페에서 영어와 이탈리아어 일색의 메뉴판을 보고 음료를 주문하거나, 자동화 시스템을 통해 영화 티켓을 사는 일이 굉장히 낯설 뿐만 아니라, 대화를 통해 갈등을 해결하는 일에서조차 버거움을 느낍니다. 남성적 군사 문화가 강한 북한에서는 몸싸움을 통해 분쟁을 해결하고, 자아비판 식의 과장된 비판을 통해 피드백을 전달하는 것이 더 일반적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낯선 사회 규범은 새로운 환경과 문화에 온전히 몰입된 상태에서만 습득될 수 있으나, 대부분의 북한이탈 청소년들은 낯선 문화를 탐방하고 알아가기에는 너무도 지쳐 있으며, 이들이 적응하는 동안 구심점의 역할을 해야 할 가정 역시 결여된 실정입니다. 

상급학교 진학과 자격증 취득 등 가시적인 동화(同化)를 강조하는 기존의 접근 방식은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북한이탈청소년의 삶에 또 하나의 커다란 장벽입니다. 한국의 공교육은 그 운영 방침이나 교과 과정 면에서, 매우 안정적이고 균일한 인구 집단을 전제하여 설계된 탓에, 이주여성(다문화가정) 자녀, 외국인, 북한이탈학생 등 작금의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새로운 집단의 필요를 효과적으로 반영하지 못합니다. 공립학교를 선택한 북한이탈청소년은 갖가지 제도적, 문화적 장벽과 싸워야 하는데, 과도한 경쟁을 조장하는 대한민국의 교육 문화는 언어적·문화적 차이를 핸디캡으로 지닌 이들에게는 너무나도 버거운 장애물입니다. 게다가 공립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북한에서의 최종 학력을 스스로 증명해야만 합니다. 담임교사나 또래 친구들은 이 모든 특수한 상황에 공감해 주지 못해, 북한이탈청소년은 더욱 큰 소외감을 느끼게 됩니다.

조명숙 펠로우는, 이 모든 요소가 북한이탈청소년에게 너무나도 불리하고 힘겨운 싸움이 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특히, 탈북 과정에서 겪은 마음의 상처가 너무도 깊어 긴 치유 기간을 가져야 하는 경우나 제3국 체류 기간이 지나치게 길어져 학령기를 놓치고 이미 20대에 들어선 경우에는 남한의 공립학교를 선택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러한 특수 상황에 있는 학생들을 위해 대안학교들이 설립되었지만, 대부분 규모가 영세하고 자원이 부족해 트라우마를 치유하여 건강한 시민을 길러내는 전인적 교육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제공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이러한 복합적 난관은 북한이탈주민 공동체에 커다란 문제를 초래했습니다. 남한 거주 북한이탈주민 자살률은 OECD 1위인 대한민국의 평균 자살률의 세 배이며(통일부, 2012년), 북한이탈청소년 중도탈락률은 대한민국 태생 청소년의 세 배(통일부와 남북하나재단 전수 조사, 2014년), 북한이탈주민 실업률은 전국 평균의 세 배이고 임금 수준은 남한 주민의 2/3(통일부와 남북하나재단 전수조사, 2014년)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새로운 소수자 집단의 지속적 유입으로, 대한민국 사회는 중요한 변화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단일민족국가’라는 정체성이 강한 대한민국의 사회경제적 시스템은 외국인노동자, 다문화가정, 북한이탈주민을 비롯한 새로운 시민 집단을 수용할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지 않습니다. 북한 내의 정치적 불안 상황은 항구적이며, 이는 가까운 미래에 대규모 탈북 사태가 발생할 가능성과도 직결됩니다.

조명숙 펠로우는 가장 소외된 청소년 집단인 북한이탈청소년을 위해 일하며, 소수자를 구조적으로 낙오시키는 불합리한 제도적 문제점을 짚어내는 동시에, 대한민국 사회가 공감과 관용에 기반하여 '타자성'을 존중하도록 촉구합니다. 조명숙 펠로우는 북한이탈청소년을 복지 제도의 무력한 수혜자에서 건강하고 주체적인 시민으로 탈바꿈시키는 새로운 교육 모델을 이미 구축해 내었으며, 앞으로의 인구 변동에 대한민국 사회가 효과적이고 탄력적으로 대처해 나갈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들을 마련해 나가고 있습니다.




THE STRATEGY

북한이탈청소년의 적응을 돕기 위한 조명숙 펠로우의 시스템적 노력은 크게 새 교과과정 설계(design)와 인증(certify) 그리고 제도 개혁(reform)의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교과 과정을 설계할 때 조명숙 펠로우가 가장 염두에 둔 것은 북한이탈청소년의 삶에 짙게 그늘을 드리운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교육에 대한 재정의는, 조명숙 펠로우가 평생 견지해 온 전인교육의 철학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즉, 교육자의 역할은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것을 넘어, 학생 개개인이 지덕체의 소양을 골고루 갖춘 건강한 시민이 되도록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여명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은 교실이라는 공간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예로, 열 명 미만의 정원으로 구성된 각 기숙사에서는 사감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부모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가족 같은 분위기가 조성된 기숙사에서, 학생들은 그토록 필요로 하던 사랑과 관심을 주고, 받을 수 있게 됩니다. 이뿐만 아니라 따뜻하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공감에 기반한 대화를 나누며 숨겨두었던 자신의 고충과 아픔을 표출할 수도 있어, 자연스러운 치유 효과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여명학교는 또한 전문 치료사가 지도하는 음악 및 미술 치료 프로그램을 정규 커리큘럼에 포함해, 학생들이 사비를 들이거나 공부 시간을 쪼개지 않아도 학교에 오는 것만으로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게 했습니다. 이렇듯 여명학교의 교육 및 생활 환경은 학업성취도만큼이나 심신 회복을 핵심 가치로 여기며, 이 교육관에 따라 사랑과 격려의 안전망으로 삶의 모든 국면에서 북한이탈청소년을 둘러싸게 됩니다.

이에 더해 조명숙 펠로우는 북한이탈청소년이 낯선 사회 규범과 일상에 자연스레 익숙해질 수 있도록 여러 프로그램을 마련했습니다. 예로, 정규 커리큘럼인 도시 체험 프로그램은 학생들이 대중교통을 타고 도심으로 이동해, 영화 티켓을 구매해 최신 영화를 관람하는 등의 간단한 일상 업무를 팀 단위로 수행해 보게 합니다. 일견 간단해 보이는 이런 현장 학습을 통해, 북한이탈청소년들은 가격을 지급하고 물건을 구매해 보는 일부터 낯선 외래어('팝콘' 등)와 남한식 한국어를 사용해 보는 일까지, 한국 사회의 일상을 면면이 체험하며 낯선 환경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낼 수 있습니다. 작은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경험은 이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며, 익숙한 공동체와 공간을 벗어나 큰 세상과 맞설 수 있는 용기를 심어 줍니다. 연중 계속되는 사회 체험 학습의 꽃은 '여명의 날' 행사로, 여명학교 학생들이 낯선 환경에 대한 두려움을 완전히 떨쳐낸 채, 천 명 남짓한 남북한 청중을 대상으로 공연과 발표를 진행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조명숙 펠로우는 또한 재정이 넉넉하지 않은 대안학교라 해도 학생들이 교사의 권위를 인정할 수 있게 해야 하며, 교사 자격증을 갖춰 추후 학력 인가 과정의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때문에 교사 자격증을 갖추고, 북한이탈청소년에 대한 전문성을 가진 교사로만 교사진을 구성하여, 학생들이 양질의 수업을 받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 모든 노력의 결과로, 여명학교는 국내 대안학교 중 중요한 역할 모델 중 하나가 되었으며, 지금까지 170명의 열정적인 졸업생을 배출했습니다. 이러한 성과가 알려지며 점점 더 많은 학생이 여명학교를 선택하고 있고, 이에 따라 재학생은 매년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2010년, 정부와의 긴 협상 끝에 조명숙 펠로우는 대안학교 인가와 관련한 중요한 교육 관련 법안 하나를 개정해 냈습니다. 개정 이전, 학력 인가를 받고자 하는 대안학교는 학교 명의의 건물과 운동장 부지를 갖추어야만 했습니다. 제한된 예산으로 운영되는 소규모 대안학교가 건물 및 부지에 관한 조항을 충족해 학력 인가를 받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당시 대안학교와 일반 학교의 교과과정 사이에 모종의 일관성을 부여해줄 기준 역시 거의 없었다는 사실 역시 주요 문제점 중 하나였습니다. 대안학교에서도 필수적으로 제공되어야 하는 교과과목으로는 어떤 것이 있을지, 자라나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부모의 국적, 사회경제적 배경, 지역적 차이에 상관없이 배워야 할 기초 지식은 어떤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합의가 없는 상황에서의 공교육 다양화란 불가능한 과업이었습니다. 대안학교는 전체 교육기관 중 매우 소수에 불과했지만, 조명숙 펠로우가 제기한 법 개정 요구는 공교육 전체가 더욱 다양하고 유동적인 인구 집단의 필요에 맞추어 변화하게 할 수 있는 유의미한 것이었습니다.

조명숙 펠로우는 학력 인가 관련법 개정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여, 비합리적인 자격 요건을 제하도록 개선했습니다. 조명숙 펠로우의 강력한 주장으로, 학교 명의의 건물과 운동장 부지에 관한 조항은 그 불합리성을 인정받아 제외되었으며, 부동산을 매입할 재정이 넉넉하지 않은 작은 대안학교들 또한 장기 임대된 건물과 인근 학교와 공유하는 운동장을 갖춤으로써 건물 및 부지에 관련된 자격요건을 충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조명숙 펠로우가 일구어낸 개혁으로, 여명학교는 공식 학력 인가를 받은 최초의 북한이탈청소년 대안학교가 되었습니다. 법 개정 이후로 정부에서도 여명학교가 수행하고 있는 필수불가결한 역할을 인지해, 2015년부터 학교 재정의 약 44%인 한화 1억 원을 지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여명학교가 공교육 시스템 내에서 더는 외부자(outlier)가 아니며, 공교육 제도의 어엿한 구성원이자 기여자임을 보여주는 변화입니다. 정부 지원을 통해 여명학교에서는 지속 가능한 재정적 기반을 다지게 되었으며, 더욱 내실 있는 장기 계획과 확산 전략을 수립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명학교에서의 놀라운 성과를 발판 삼아, 조명숙 펠로우는 정부가 북한이탈청소년의 특수한 상황을 인지하고, 더 나아가 균일한 인구 집단(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고, 신체적·정신적 장애가 없으며, 부모와 본인이 모두 대한민국 출신인 청소년)만을 염두에 두었던 기존 공교육의 문제점과 앞으로의 과제를 직시하도록 설득하고 있습니다. 여명학교가 마련한 법제적 돌파구 덕분에, 북한이탈청소년뿐 아니라 다문화가정 자녀나 자퇴 청소년 등 다른 소수 집단을 대상으로 한 대안학교들 역시 학력인가를 고려하고 있어, 지속 가능한 대안 교육의 발판이 구축되고 있는 것 역시 또 하나의 중요한 성과입니다. 이처럼 조명숙 펠로우는 공교육의 범위를 넓히는 법제 개혁을 시행하도록 핵심 이해관계자들을 꾸준히 설득하고 있으며, 이를 통한 일련의 개혁으로 대한민국 공교육은 기존 공립학교에서 수용하지 못했던 소수자 집단까지 포용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북한이탈청소년의 정착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또 하나의 집단은 바로 일반 학교 선생님입니다. 북한이탈청소년 중 8할이 대안학교가 아닌 공립학교를 선택하지만, 대부분의 공립학교 교사들은 경험 부족, 문화적 몰이해 등으로 인해 북한이탈청소년을 대할 준비가 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조명숙 펠로우는 교사 개인의 힘으로 문제 상황을 극복하도록 방치하는 것은 불합리하며 불가능하다 판단, 여명학교가 독일 아데나워 재단 한국 사무소의 지원을 받아 진행하는 '통일학교' 세미나와 교사연수를 통해 사실상 북한이탈주민을 난생처음 접하게 되는 공립학교의 일반 교사들도 필요한 지식과 열정을 가지고 학교 현장에서 변화를 만들어 나갈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동시에, 조명숙 펠로우는 미시적인 전략 개혁 역시 법제 차원의 거시적인 변화만큼이나 사람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인지하고, 북한이탈청소년과 그 교육자들에게 가장 큰 어려움을 안겨 주는 고충을 원인부터 제거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중학교 검정고시의 시행횟수를 연간 1회에서 2회로 늘리도록 해, 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학생들이 시험 준비에만 1년을 더 할애할 필요가 없도록 제도를 개선했습니다. 이러한 개혁들은 험난한 정착 및 적응 과정을 겪고 있는 북한이탈청소년의 시간적·정신적 부담을 덜어 주었으며, 정부가 기존의 관행들을 더욱 냉철하게 분석하고 개선할 수 있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조명숙 펠로우는 북한이탈청소년 대안 교육 분야에서 명실상부한 전문가로서 입지를 굳건히 다졌습니다. 최근 대통령 직속 통일준비위원회에서 현장 기반 전문가로는 유일하게 조명숙 펠로우를 위촉했다는 사실은 조명숙 펠로우가 현장과 정부의 교두보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이 특별한 입지를 십분 활용해, 조명숙 펠로우는 여명학교를 중심으로 뜻 있는 언론인, 교육자, 기업 파트너 및 정치인이 모일 수 있는 플랫폼을 확장해 나가고 있으며, 북한이탈주민의 사회 통합과 정착에 대한 담론에 전국적으로 새 바람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이 중 몇몇 기업과 비정부기구가 모여 최근 북한이탈청소년의 언어 적응을 돕기 위한 '말동무'라는 스마트폰 앱을 개발했으며, 여명학교 교사 일동 역시 힘을 모아, 북한이탈청소년을 더 효과적으로 지도하고 감싸 안기 위한 유용한 교수법과 팁을 담은 가이드북 출판을 준비 중입니다.

이처럼 조명숙 펠로우는 학교에 기반한 역동적인 체인지메이커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가동해, 대한민국이 모두에게 더욱 관용적인 사회, 열린 사회, 통합적인 사회가 될 수 있도록 초석을 다지고 있습니다. 첫 10년간 이 과업의 '베이스캠프' 역할을 수행한 여명학교 역시 안정적인 기틀을 갖추게 되었으며, 이에 힘입어 조명숙 펠로우는 남·북한 출신 학생들로 구성된 "통일학교(가칭)" 설립을 계획 중입니다. 조명숙 펠로우는 향후 북한이탈청소년은 물론 다른 소외계층과 소수집단에게도 '통일학교'의 문을 활짝 열 계획이며, 그 현장을 통해 대한민국 사회 통합의 청사진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THE PERSON

매우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조명숙 펠로우는 도시 빈민촌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아이들을 먹이기 위해 공장 일부터 막걸리 장사, 구멍가게 운영까지 가리지 않았던 조명숙 펠로우의 어머니는, 노숙인이 구걸하러 오면 언제나 따뜻한 밥을 내줄 만큼 심성이 고운 분이셨습니다. 타인의 고통을 모른 체하지 않고, 베풀던 어머니의 삶의 태도는 조명숙 펠로우의 가치관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집 인근에는 초등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조명숙 펠로우는 한 시간씩 걸어 등교하곤 했습니다. 초등학교가 위치한 동네는 형편이 비교적 넉넉한 곳이었고, 조명숙 펠로우는 중상류층 또래들과 생활해야 했습니다. 빈민가 아이들은 중산층 동급생들과 어울리는 일을 어려워했고, 조명숙 펠로우의 동네 친구 중 대다수는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공부를 포기했습니다. 조명숙 펠로우는 비교적 어린 나이에,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연대의식을 저해하고 사회 분열을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으며, 그 분열은 사회 구성원 중 가장 어린 집단에서부터 시작되어 지속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문교육과에 진학해 예비 교육자의 길을 걷던 조명숙 펠로우의 인생에, 예기치 않게 중요한 전환점이 찾아옵니다. 대학교에 다니던 조명숙 펠로우는 어느 날, 잘못 걸려 온 파키스탄 노동자의 전화를 받게 되고, 영어를 거의 하지 못했음에도 전화를 끊지 않고 낯선 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는 역시 외국인 노동자인 자신의 친구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었는데, 그 친구는 산업재해로 얻은 상처를 치료하지 못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조명숙 펠로우는 잘 사는 나라의 빈민보다, 가난한 나라에서 더 나은 삶을 위해 낯선 땅에 온 이들의 삶이 더 척박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당시 노동법은 고용주가 외국인 노동자에게 상해 보상을 해 줄 의무를 규정하지 않아, 고용주들은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산업 재해 보상을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조명숙 펠로우는 산업 재해를 입은 열네 명의 외국인 노동자들과 함께 농성하며, 정부의 노동법 개정을 요구했습니다. 27일간의 농성 끝에 정부는 마침내 법규를 개정, 모든 이민자가 산업재해 보험의 수혜자로 보상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시까지도 한국인 노동자들도, 5인 이하 사업장에서는 산업 재해 보험 가입 의무가 없었기에 이들도 산업 재해를 당할 경우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외국인 노동자들이 산업재해 보상을 받을 수 있게 되자, 법 앞에 평등이라는 원칙에 따라 내국인 노동자들도 근무처의 크기와 무관하게 누구라도 산업재해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조명숙 펠로우는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의 권리를 끌어올려 그들이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하면, 사회 전체의 복지 수준이 제고된다는 '활동 원칙'을 도출해 내었으며, 이는 이후 조명숙 펠로우의 주요한 철학이 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조명숙 펠로우는 외국인노동자 권리 옹호 단체인 “피난처”의 간사로 합류해, 외국인노동자들을 도와 산업재해 및 인권 침해에 대한 제반 소송 업무를 담당하게 됩니다.

1997년, 조선족 동포를 한국에 근로자로 초청해 준다는 명분으로 조선족 동포들에게 돈을 받고 한국으로 잠적한 ‘중국교포 송출 사기사건’을 ‘피난처’에서 조사한 것이 언론에 크게 보도되며 중요한 사회 이슈로 대두되자, 당시 갓 결혼식을 올렸던 조명숙 펠로우는 사건의 진상을 보다 정확히 파악하고자 중국 동북부를 신혼 여행지로 정하고, 남편인 피난처 이호택 대표와 함께 험난한 신혼여행 길에 올랐습니다. 그곳에서 조명숙 펠로우는 탈북자들의 비참한 삶을 목도하고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탈북자들은 중국 공안과 인신매매범의 추적을 받으며, 국적 없는 난민 상태로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습니다. 긴 토론 끝에, 이 신혼부부는 중국에서 만난 탈북자 중 일부를 목숨을 걸고 한국까지 데려가기로 합니다. 이들은 탈북자 열세 명과 함께 중국을 횡단하고 베트남 국경, 사선(死線)을 넘는 위험한 탈출을 감행했으며, 천신만고 끝에 이들을 한국까지 안전하게 인도했습니다.

한국에 돌아온 조명숙 펠로우는, 함께 입국한 북한이탈주민들이 목숨을 살려주었다고 부담스러워할 것을 염려해 그들과 2년간 연락을 끊고 지냈습니다. 그러나 조명숙 펠로우가 2년 후 이들을 만났을 때 어른들은 파산해 있었고, 아이들은 학교에 적응하지 못한 채 탈선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북한에서는 당에서 모든 결정을 내려 주었던 것에 반해, 남한에서는 처음으로 모든 결정을 스스로 내려야 했고, 이러한 상황이 이들에게는 무척 버겁고 혼란스러웠던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조명숙 펠로우는 단순한 지원과 격려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함을 깨닫고, 사회운동가(activist)가 아닌 사회혁신기업가(social entrepreneur)로 자신의 정체성을 재정비하게 됩니다. 많은 이들의 우려와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조명숙 펠로우는 반지하 사무실을 얻어 북한이탈청년을 위한 야학으로 개방했습니다. 사람들의 걱정과는 달리 야학은 대단히 성공적이었고, 점점 더 많은 학생과 자원활동가들이 '자유터 학교'로 모여들어, 2004년 여명학교 설립에 중요한 기반이 되었습니다.